#어거스틴 #요한복음

설교 제목: 요한복음 강해 1강


본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가 방금 들은 사도의 본문, 곧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그리고 여기 모인 여러분,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 중에는 여전히 육신에 따라 이해하며 아직 영적인 이해로 자신을 고양시키지 못한 많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섞여 있다는 사실을 숙고할 때, 나는 주님의 너그러우심을 의지하면서도 어떻게 나의 작은 분량으로 복음서에서 읽은 이 말씀을 전하고 설명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사실, 육에 속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형제들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때문에 침묵해야 할까요? 만약 우리가 침묵한다면 왜 이 말씀을 읽었겠습니까? 설명이 없다면 왜 듣겠습니까? 더 나아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왜 설명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여러분 중에는 설명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설명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미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분들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나는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의 권리를 빼앗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깨닫지 못하는 이들의 주의력을 낭비하게 될까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셔서 아마도 모두에게 충분한 유익이 있을 것이며, 각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말하는 자 역시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할 뿐입니다. 그 실재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2) 형제들아, 나는 감히 말하건대 아마도 요한 자신조차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 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했을 뿐입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인간이었지만, 여전히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감을 받았기에 무언가를 말한 것이지, 만약 영감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영감을 받은 인간이었으므로 실재 전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바를 말한 것입니다.


2.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 요한은 성경에 기록된 바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공의로 말미암아 그러하리로다" (시 72:3)라고 한 그 '산들' 중 하나였습니다. 산들은 고귀한 영혼들이요, 작은 산들은 미천한 영혼들입니다. 그러나 산들이 평강을 받는 바로 그 이유는 작은 산들이 공의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작은 산들이 받는 공의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산'이라 불리는 더 위대한 영혼들이 지혜 자체에 의해 조명되지 않았다면, 더 작은 영혼들은 믿음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산들이 조명되어야만 어린아이들이 파악할 수 있는 바를 그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 산들이 평강을 받음으로써 작은 산들이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산들에 의해 교회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산들 스스로가 교회에 평강을 공포할 때, 그들은 자신이 평강을 받은 분(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속임수 없이 진실하게 평강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참으로 난파를 일으키는 다른 산들도 있습니다. 누구든 그곳으로 배를 몰면 배는 파괴됩니다. 위험에 처한 자들이 땅을 볼 때 그곳으로 상륙하려 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때로는 산 위에 땅이 보이고 그 산 아래에 바위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 그 산을 향해 가려다가 우연히 바위에 부딪히면, 그곳에서 안식처가 아니라 슬픔을 발견하게 됩니다.

(2)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위대해 보이는 어떤 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단과 분파를 만들어냈고 하나님의 교회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나눈 이들은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라고 언급된 그 산들이 아니었습니다. 연합을 찢어발긴 자들이 어떻게 평강을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4. 그러나 백성에게 선포하기 위해 평강을 받은 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지혜 자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고전 2:9)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것이라면, 어떻게 요한의 마음에는 들어갔을까요? 요한은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요한의 마음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요한의 마음이 그것을 향해 올라간 것입니까?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래에서 위로 오는 것이지만, 사람의 마음이 올라가는 대상은 사람보다 위에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요한의 마음에 올라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어떤 방식으로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요한 자신이 인간이 아닌 한도 내에서 그의 마음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가 인간이 아니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가 '천사'가 되기 시작했다는 범위 안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든 거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령(messengers)이기에 천사들과 같습니다.

(2)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들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육신에 속하고 육에 속한 자들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전 3:4) 그들이 '사람'이라는 점을 책망하실 때, 사도는 그들을 어떤 존재로 만들고자 하셨던 것일까요? 그분이 그들을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셨는지 알고 싶습니까? 시편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 82: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한 인간에 머물지 않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즉 우리의 비천함으로부터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 모습조차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5. 나의 형제들아, 요한도 바로 그 산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말했습니다. 이 산은 평강을 받았고, 말씀의 신성을 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산이었습니까? 얼마나 높았습니까? 그는 세상의 모든 산봉우리를 넘어섰고, 하늘의 모든 들판을 넘어섰으며, 별들의 모든 높이를 넘어섰고, 천사들의 모든 찬양대와 군대를 넘어섰습니다. 만물 중 창조된 모든 것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그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그분께 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2) 여러분은 그가 어디에 도착했는지 보지 않고서는 그가 무엇을 넘어섰는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에 대해 묻습니까? 그것들은 지어졌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해 묻습니까? 물론 그것들도 훨씬 더 명백하게 지어졌습니다. 영적인 존재들, 곧 천사들, 천사장들, 보좌들, 주관들, 능력들, 권세들에 대해 묻습니까? 그들조차 지음을 받았습니다. 시편에서 이 모든 것들을 나열한 뒤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지음을 받았으며 그가 명령하시매 창조되었음이로다." (시 148:5)

"그가 말씀하시매 지음을 받았다"면, 그것들은 '말씀'을 통해 지어진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들이 말씀을 통해 지어졌다면, 요한의 마음은 그가 말하는 바, 즉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는 그 실재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말씀을 통해 지어진 모든 것들을 뛰어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3) 그렇다면 이 산은 어떤 산이었습니까? 작은 산들이 공의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평강을 받은 그 산들 중에서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높은 산이었겠습니까?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6. 형제들아, 요한이 우리가 조금 전에 노래했던 시편의 그 산들 중 하나가 아닌지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 12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여러분이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이 산을 향하여 눈을 드십시오. 즉, 복음 전도자 요한에게로 여러분 자신을 높이고 그의 의미로 올라가십시오. 그러나 이 산들이 평강을 받을지라도,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사람에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산을 향해 눈을 들지는 마십시오.

(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라고 말할 때, 즉시 그 뒤에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2)라는 고백을 덧붙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도움이 올 그 산들을 향해 눈을 듭시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할 대상은 산들 자체가 아닙니다. 산들은 우리에게 제시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들이 받는 바로 그곳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향해 눈을 들 때, 성경은 사람들을 통해 전달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올 산들을 향해 눈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한 이들 역시 인간이었기에, 그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요 1:9)이 계셨던 것입니다.

(3)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요 1:20)고 말했던 저 저명한 세례 요한 역시 산이었습니다. 누구도 산에 소망을 두다가 산을 비추시는 분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그 역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요 1:16)라고 고백하며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말하되, 여러분에게 오는 도움을 산들의 공로로 돌리지 말고, 즉시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덧붙여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7. 형제들아, 나는 이 목적을 위해 나의 발언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향해 마음을 높일 때, 즉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는 복음의 말씀과 그 뒤에 읽힌 구절들이 울려 퍼질 때, 여러분은 산들을 향해 눈을 들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산들이 이 일들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을 생각할 어떤 수단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일들을 들을 수 있도록 산들로부터 여러분에게 도움이 왔습니다.

(2) 그러나 여러분은 들은 바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께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산들은 스스로 빛을 비출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 역시 들음으로써 빛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말씀을 한 자 역시 그것을 받았습니다. 나의 형제들아, 주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시게 하실 그것을 주님의 가슴으로부터 들이켰던 그 요한 말입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마실 '말씀들'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마실 것을 준 그 자신이 마셨던 그 근원으로부터 이해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도움이 올 산들을 향해 눈을 들어 그곳으로부터 잔(즉, 마시도록 주어진 말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요한이 자신의 가슴을 채웠던 그 근원으로부터 여러분의 가슴을 채우십시오. 여러분은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분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각자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높여 선포되는 바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아마도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내가 여러분 곁에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훨씬 더 가까이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의 눈에 보이지만, 그분은 여러분의 양심을 감독하십니다. 여러분의 귀는 내게 향하되, 마음은 그분께 향하여 양쪽을 모두 채우십시오. 보십시오, 여러분은 눈과 신체적 감각을 우리에게 향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우리는 저 산들에 속하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복음 자체와 복음 전도자에게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채움을 얻기 위해 여러분의 마음은 주님께 높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자가 무엇을 높이고 있으며 어디로 높이고 있는지를 보면서 높이십시오.

(4) 무엇을 높이고 어디로 높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어떤 마음을 높여 올리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님께로 높이는 이유는 그것이 육신적 쾌락의 짐에 눌려 위로 올라가기도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육신의 짐을 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까? 절제를 통해 하나님께 높여 드릴 그 마음을 깨끗이 하기에 힘쓰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8. 자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는 말씀이 울려 퍼진 것으로 어떤 유익을 얻었습니까? 우리도 말할 때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도 그런 단어였을까요? 우리가 말한 이 단어들은 울려 퍼지고 사라졌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울려 퍼지고 끝이 났을까요? 어떻게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겠습니까? 만약 그 말씀이 울려 퍼지고 사라졌다면, 그분에 의해 창조된 것들이 어떻게 그분에 의해 통치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말하여지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그 말씀은 어떤 종류의 말씀입니까?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여, 주의를 기울여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상적인 사용으로 인해 말씀(단어)들이 우리에게 값싸게 여겨져 왔습니다. 울려 퍼지고 사라짐으로써 값싸졌고, 단어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도 내면에 머물러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입 밖으로 나가는 것은 소리입니다. 소리로부터 여러분이 이해하는 것, 즉 소리 자체는 아니지만 영 안에서 진실하게 말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의 단어입니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은 세 글자(God)와 한 음절로 얼마나 짧습니까! 하나님이시라는 그 모든 실재가 진정 이 세 글자와 한 음절뿐입니까? 아니면 이 단어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귀한 만큼, 그 소리는 하찮은 것입니까?

(2)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했을 때 내 마음속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든 가변적인 육신과 혼의 피조물을 초월하는 어떤 위대하고 완전한 실재가 우리의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변화에 종속되십니까, 아니면 불변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즉시 "하나님이 변화에 종속된다고 믿거나 상상하는 것조차 내게서 멀지어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혼이 비록 작고 아마도 여전히 육신적일지라도,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는 답밖에는 내게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가변적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그분에 대한 이해의 불꽃을 가질 수 있었기에, 하나님은 불변하시다고 확신을 가지고 내게 답할 수 있었습니까? 살아 계시고, 영원하며, 전능하고, 무한하며,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에나 온전하며,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 어떤 실재를 생각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3) 그러나 이것이 세 글자와 한 음절로 구성된 그 소리입니까? 그러므로 말해지고 사라지는 다른 것들은 소리이며, 글자이며, 음절입니다. 울려 퍼지는 이 말씀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소리가 의미했던 것, 말하는 자의 생각 속에 존재하고 듣는 자의 이해 속에 존재하는 그것은 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습니다.


9. 다시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마치 마음에서 태어난 어떤 설계(design)와 같은 말씀을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설계를 낳는다면, 그 설계는 그곳에 존재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러분 마음의 소생이자 여러분 가슴의 아들입니다. 어떤 건물을 짓기 위해, 땅 위에 어떤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기 위해 가슴은 먼저 설계를 낳습니다.

(2) 설계는 이미 태어났지만,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보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여러분이 그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고 건물을 세워 완성에 이르게 할 때까지는 그것을 감탄하며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멋진 건물을 보고 건축가의 설계를 찬양합니다. 그들은 보는 것에 놀라며 보지 못하는 것(설계)을 즐거워합니다. 설계를 볼 수 있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설계가 어떤 위대한 건물 때문에 찬양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설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지 않습니까?

(3) 우주의 구조를 보십시오. 말씀을 통해 무엇이 만들어졌는지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의 본성이 어떠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이 두 물체, 즉 하늘과 땅을 보십시오. 하늘의 찬란함을 누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땅의 풍성함을 누가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계절의 변화를 누가 적절히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씨앗들의 힘을 누가 충분히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너무 오랫동안 세부 사항을 열거하다가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적게 말하게 될까 봐 침묵하며 건너뛰는 것들을 보십시오.

이 구조로부터 그것을 만드신 말씀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관찰하십시오. 그리고 그것만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신체적 감각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해 천사들도 지어졌고, 그 말씀에 의해 천사장들도 지어졌으며, 능력들과 보좌들과 주관들과 권세들도 지어졌습니다. 말씀을 통해 만물이 지어졌습니다. 이로부터 말씀의 본성이 어떠한지 숙고하십시오.


10. 아마도 누군가 내게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말씀을 생각합니까?" 여러분 자신에 관해서라면, "말씀"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을 어떤 값싼 이미지로 형성하지 마십시오. 매일 듣는 그런 단어들, 즉 '누가 그런 말을 했다', '그가 그런 말을 했다',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한다'는 식의 단어들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단어라는 이름을 끊임없이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은 마치 가치를 잃은 것처럼 되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인간의 말을 들을 때 익숙해진 것처럼 그것을 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바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이제 불신앙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 중 누군가가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게 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만물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말씀 자체도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또 다른 어떤 말씀을 통해 만들어졌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 말씀을 만든 '말씀의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말씀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만물을 만든 그분 자신은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하십시오. 만물을 만든 그 통로가 된 존재는 자기 자신을 통해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를 믿으십시오. 그는 모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한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을 만드시니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이런 방식으로 나열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가 이르시되"에서 우리는 누구를 이해합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무엇이 만들어졌습니까? 어떤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피조물의 만들어짐 사이에, 그것을 만든 통로가 된 '말씀'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대로 되라"고 말씀하셨고 그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불변합니다. 비록 가변적인 것들이 말씀을 통해 만들어졌을지라도, 말씀 자체는 불변합니다.


12. 그러므로 만물을 만드신 그분이 친히 만들어졌다고 믿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새롭게 지음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말씀을 통해 지음을 받았지만, 말씀을 통해 새롭게 지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결핍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새롭게 지음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말씀을 통한 창조가 여러분에게 일어났고 여러분이 그분을 통해 만들어졌을지라도, 여러분이 결함 있게 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통해 결함 있게 되었다면, 여러분을 만드신 분이 여러분을 재창조하시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을 통해 자신을 더 악하게 만들었다면, 여러분을 창조하신 분이 여러분을 재창조하시게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말씀에 대해 잘못된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이 어떻게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재창조하시겠습니까?

(2) 복음 전도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고 말하는데, 여러분은 "태초에 말씀이 만들어졌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라고 말하는데, 여러분은 말씀 자체도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복음 전도자는 "태초에 말씀이 만들어졌느니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약 말씀이 '계셨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만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고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는 이 말씀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성장할 때까지 그것을 미루어 두십시오. 그것은 단단한 음식입니다. 여러분이 양육되어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큼 강해지도록 젖을 먹으십시오.


13. 자 이제 형제들아,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봅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을 어떤 '실체'인 것처럼 상상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많은 이들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마치 어떤 것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확실히 죄는 그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우상 역시 말씀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상은 어떤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 자신은 말씀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우상 속에 있는 인간의 형태는 말씀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성경에 기록되기를 "우리는 우상이 세상에 아무것도 아님을 아노라" (고전 8:4)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말씀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성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 창조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하늘에 자리를 잡고 높은 곳에서 빛나는 것들, 하늘 아래를 나는 것들, 온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 각각의 모든 피조물들—나의 형제들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분명하게 말하겠습니다—천사로부터 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입니다. 피조물 중에 천사보다 더 장엄한 것이 어디 있으며, 피조물 중에 지렁이보다 더 비천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천사를 만드신 그분을 통해 지렁이 또한 만들어졌습니다.

(2) 그러나 천사는 하늘에 적합하고 지렁이는 땅에 적합합니다. 창조하신 분이 또한 배치하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지렁이를 하늘에 두셨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책망했을 것이고, 천사가 부패한 고기에서 나오도록 작정하셨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책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의 그렇게 하시면서도 책망받지 않으십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 그들이 지렁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지렁이들로부터 그분은 천사들을 만드십니다. 주님 친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시 22:6)고 말씀하신다면, 욥기에 기록된 이 말씀을 누가 주저하며 말하겠습니까?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욥 25:6) 먼저 "사람은 구더기"라고 말하고, 그다음에 "인생(사람의 아들)은 벌레"라고 했습니다. 벌레는 부패함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람은 구더기"요 "인생은 벌레"인 것입니다.

(3)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기꺼이 무엇이 되셨는지 보십시오. 왜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되셨습니까? 씹을 수 없는 여러분이 젖을 빨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전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는 말씀을 이해하십시오. 그분을 통해 절대적으로 모든 피조물, 큰 것과 작은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분을 통해 위에 있는 것들과 아래에 있는 것들이 만들어졌으며, 영적인 것들과 육체적인 것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형상도, 구조도, 부분들의 결합도, 무게와 수와 측량을 가질 수 있는 어떤 실체도 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 말씀에게 성경은 "주께서 만물을 그 척도와 수와 무게대로 정하셨나이다" (외경 지혜서 11:20)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14. 그러므로 혹시 파리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때 누구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마귀에게 조롱당하여 파리에 사로잡혔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새 잡는 이들은 배고픈 새들을 속이기 위해 올가미에 파리를 놓아두곤 합니다. 이처럼 이 사람들도 파리 때문에 마귀에게 속았습니다.

(2)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보여드리기 위해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날 어떤 이가 파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마니교도가 그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파리를 견딜 수 없으며 그것들을 몹시 증오한다고 말하자, 즉시 마니교도가 물었습니다. "누가 그것들을 만들었습니까?" 그는 괴로움 속에 있었고 그것들을 증오했기에 감히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편교회 신자였습니다. 마니교도가 즉시 암시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지 않다면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정말로 나는 마귀가 파리를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그러자 상대는 즉시 말했습니다. "당신이 문제를 지혜롭게 이해하여 인정한 대로 마귀가 파리를 만들었다면, 파리보다 조금 더 큰 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는 벌과 파리가 매우 밀접한 관계이기에 하나님이 벌은 만드셨지만 파리는 만들지 않으셨다고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마니교도는 벌에서 메뚜기로, 메뚜기에서 도마뱀으로, 도마뱀에서 새들로, 새에서 양으로, 그다음엔 소로, 코끼리로, 마침내 인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설득했습니다. 그 가련한 사람은 파리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마귀가 소유한 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3) 진실로 바알세불은 '파리들의 군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기록되기를 "죽은 파리들이 향기로운 기름을 악취 나게 만든다" (전 10:1)고 하였습니다.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15. 형제들아, 내가 왜 이런 말들을 했겠습니까? 원수의 속임수에 대항하여 여러분 마음의 귀를 닫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시고 그것들을 단계별로 배치하셨음을 이해하십시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부터 많은 악을 겪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도 이런 것들을 겪습니까? 아마도 우리 역시 그런 삶 속에서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형벌에 대해서는 재판관이 아니라 여러분의 죄를 탓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저 무가치하고 가장 작은 피조물을 만드셔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신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사람이 교만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뽐내고,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죽을 인간에게 공포를 심어주며, 인간임에도 이웃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높였기에, 그는 벼룩에 의해서도 낮아질 수 있습니다.

(2) 어떤 이유로 인간적인 교만으로 자신을 부풀립니까?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모욕했고, 여러분은 부풀어 올라 화를 냈습니다. 잠을 잘 수 있도록 벼룩부터 제거하십시오. 여러분이 누구인지 깨달으십시오! 형제들아, 우리를 괴롭히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교만을 제어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음을 알게 하기 위해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로의 백성을 곰이나 사자나 뱀으로 길들이실 수도 있었으나, 가장 비천한 것들에 의해 그들의 교만이 꺾이도록 파리와 개구리들을 보내셨습니다.


16.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만물"은, 즉 각각의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런데 어떻게 만물이 그를 통해 만들어졌습니까? "지은 것이 그 안에서 생명이었느니라." (요 1:3-4의 라틴어 본문 해석)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지어진 그것은 생명이니라." 우리가 문장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면 모든 것이 생명입니다. 무엇이 그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분 친히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시편에서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시 104:24)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이시고 시편이 "주께서 지혜로 만물을 지으셨다"고 말한다면, 만물이 그를 통해 만들어진 것처럼 그것들은 그 안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2) 사랑하는 형제들아, 만약 만물이 그 안에서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만들어진 그것이 생명이라면, 땅도 생명이고 나무도 생명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나무가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십자가의 나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렇다면 돌도 생명입니다. 저 추악한 마니교도들이 다시 우리에게 몰래 다가와 돌에도 생명이 있고 벽에도 혼이 있으며 밧줄과 양모와 옷에도 혼이 있다고 말하게 하지 않도록, 문장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미친 듯이 지껄이며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격퇴당하고 거절당하면 마치 성경을 인용하는 듯이 선언합니다. "왜 '지은 것이 그 안에서 생명이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까? 만물이 그 안에서 만들어졌다면 만물은 생명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읽으십시오. "지은 것이"—여기서 구두점을 찍고, 그다음에 붙이십시오—"그 안에서 생명이었느니라."

(3)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땅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땅 자체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 자체 안에는 영적인 방식으로 땅이 만들어지게 된 어떤 이성(reason, 설계)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17.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여, 내가 할 수 있는 한 이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목수가 궤(chest)를 만듭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창조적 지식(설계) 속에 궤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창조적 지식 속에 궤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을 제작할 때 어떤 근거로 그것을 만들어내겠습니까? 그러나 궤는 그의 창조적 지식 속에 존재할 때, 눈에 보이는 그 궤와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적 지식 속에서 그것은 보이지 않게 존재하며, 제작된 산물 속에서 그것은 보이게 존재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그것은 산물로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수의 창조적 지식 속에서 그것이 사라집니까? 산물로서 하나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의 창조적 지식 속에 존재하는 다른 하나도 남아 있습니다. 산물인 궤는 썩을 수 있지만, 그의 창조적 지식 속에 존재하는 다른 하나로부터 또 다른 궤가 다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창조적 지식 속의 궤와 산물인 궤에 주목하십시오. 산물인 궤는 생명이 아니지만, 창조적 지식 속의 궤는 생명입니다. 산물이 나오기 전에 이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기술자의 혼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만물이 만들어진 통로인 하나님의 지혜는 만물을 제작하기 전에 자신의 창조적 지식에 따라 만물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 창조적 지식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 즉시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들어진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땅을 봅니다. 그분의 창조적 지식 속에는 땅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하늘을 봅니다. 그분의 창조적 지식 속에는 하늘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해와 달을 봅니다. 이것들 역시 그분의 창조적 지식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그것들은 물체들이지만, 그분의 창조적 지식 속에서 그것들은 생명입니다.

(3) 조금이라도 능력이 된다면 이것을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위대한 문제가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위대하지 않은 나에 의해, 혹은 위대하지 않은 나를 통해 표현되었을지라도, 그것은 위대하신 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작은 나에 의해 표현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할 수 있도록 바라보고 있는 저분은 작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파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파악하십시오. 파악할 수 없는 자는 파악할 수 있게 되도록 마음속에서 그것을 양육하십시오. 무엇으로 양육해야 합니까? 단단한 음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젖으로 양육하십시오.

육신을 통해 나신 그리스도를 떠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신 말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그분께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18. 다음 말씀이 이를 이어갑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바로 이 생명으로부터 사람들이 조명을 받습니다. 가축들은 조명을 받지 못합니다. 가축들은 지혜를 볼 수 있는 이성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지혜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지은 바 된 그 생명, 바로 그 생명이 빛입니다. 모든 생물들의 빛이 아니라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래서 잠시 뒤에 성경은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9)

(2) 그 빛에 의해 세례 요한이 조명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동일한 빛에 의해 복음 전도자 요한 자신도 조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요 1:20, 27)고 말했던 그는 바로 그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말했던 그 역시 그 빛에 의해 조명되었습니다. 이처럼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19. 그러나 아마도 죄에 짓눌려 이 빛을 볼 수 없기에 아직 그것을 받을 수 없는 둔감한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빛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빛이 부재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들 자신이 죄 때문에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나의 형제들아, 마치 맹인이 태양 아래 놓여 있을 때 태양은 그에게 현존하지만 그는 태양에 대해 부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둔감한 사람, 모든 악한 사람, 모든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서 맹인입니다. 지혜는 현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맹인과 함께 현존합니다. 그것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그를 떠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것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 수단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마치 눈이 더럽고 아파서, 먼지나 눈곱이나 연기가 눈을 자극하여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의사가 "네 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라, 그래야 네 눈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2) 먼지, 눈곱, 연기, 이것들은 죄와 불법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현존하는 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지혜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원문 or 출처

Augustine of Hippo,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10, ed. Thomas P. Halton, trans. John W. Rettig, vol. 78, The Fathers of the Church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88), 39–59쪽.